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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은 금세기 성서 고고학계에서 최대 사건으로 평가되는 '사해사본'이 발견된 해다. 그해 11월 23일 아침,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고고학 교수 수케닉(Sukenik)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구예루살렘에 사는 한 아랍인 골동품상이 급히 만나자는 전화였다.
당시는 이스라엘의 독립전야로 아랍인과 유대인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예루살렘은 아랍인 구역인 구예루살렘과 유대인 구역인 신예루살렘으로 분할되었고, 철조망 바리케이드가 중간을 막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 고고학 교수와 골동품상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만났다. 골동품상은 철조망 너머로 히브리어로 쓰여진 양피지 한 조각을 들어보였다. 고고학자는 그것이 고대에 쓰여진 두루마리 책의 일부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골동품상의 말은 사해부근 동굴에서 베두인들이 3개의 두루마리 책을 발견하였고, 현재 베들레헴에 사는 아랍 상인이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케닉 교수는 베들레헴에 사는 아랍 상인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서는 유대인이 아랍인 도시 베들레헴에 간다는 것은 생명을 내건 모험이었다.
그날 저녁 수케닉 교수는 아들에게 새로 발견된 고대문서를 찾기 위해 베들레헴 가겠다고 말했다. 30대의 그의 아들은 이스라엘 지하군대(이스라엘 독립 이전이었으므로) 총사령관 야딘(Yadin)장군이었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야딘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고고학자의 입장으로서는 베들레헴에 가시길 권합니다. 그러나 아들로서는 가지마시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는 가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다음날 이른 새벽 수케닉 교수는 베들레헴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아랍 상인으로부터 3개의 두루마리 책을 사는 데 성공했다. 고고학계와 기독교계를 놀라게 한 사해사본(Deadsea Scrolls)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해사본들은 사해 북서쪽 쿰란(Qumran)지역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2,000년 동안이나 질그릇 항아리 속에 보관되어 내려온 것이, 1947년에 베두인들에 의해서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아랍인 사이에서는 발견과정이 이렇게 전해진다. '쿰란 근처에 사는 베두인 소년이 잃어버린 양을 찾다가 동굴이 보이자 돌을 던졌다.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을 못 이긴 소년은 동굴로 기어들어가 두루마리 책들을 발견했다. 베두인 소년은 베들레헴으로 가지고 가서 돈 몇푼을 받고 아랍 상인에게 넘겼다.'
수케닉 교수가 3개의 사해문서를 구입한 지 꼭 2달 후, 그에게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4개의 두루마리책을 갖고 있다는 사람이 건 전화였다. 그가 수케닉을 찾아와 4개의 두루마리 책을 펼쳐보였을 때 그것도 틀림없는 사해사본이었다. 흥분한 고고학자는 즉시 그것을 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연락을 끊은 채 잠적했고, 수케닉 교수는 1953년 사망했다.



- 아버지의 꿈을 이은 아들 -

이 4개의 두루마리 책은 사실은 예루살렘에 있는 시리아 정교회 사무엘 대주교의 것이었다. 그가 아랍 상인으로부터 헐값에 산 것이었다. 대주교는 이것이 어느 정도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확인하려고 중간인을 내세워 수케닉 교수에게 감정을 받게 한 것이었다. 4개의 두루마리 책이 귀중한 사해사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무엘 대주교는 비싼 값으로 팔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수백만 달러라는 엄청난 고액을 요구하는 바람에 1954년까지 팔지를 못했다.
한편 그 동안 군사령관 생활을 마친 수케닉 교수의 아들 야딘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고학자가 됐다. 1954년 학술 강연차 미국을 방문한 그는 아버지가 사지 못했던 4개의 사해사본이 아직도 팔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미국인을 중간에 내세워 값을 흥정한 끝에 25만 달러에 낙찰시켰다.
그러나 야딘에게는 그런 돈이 없었다. 궁리 끝에 그는 이스라엘로 급히 전보를 쳤다. 이스라엘 수상으로부터 신속하게 회답이 왔다. '이스라엘 정부에서 지불을 보증할 것임. 독을 마련해 꼭 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야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여행가방 속에는 4개의 두루마리 책이 소중하게 들어 있었다. 그 후 1967년 야딘은 또 다시 8번째의 사해사본을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 두루마리 책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해사본 박물관 '책의 전당'(Shrine of the Book)에 소중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 박물관 앞에 서면 수케닉 교수와 야딘 부자가 사해사본을 구하기 위해 쏟은 헌신적 노력에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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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그릇 항아리 속에 잠든 보물 -

한편 1951년부터 1956년까지 6년간 고고학자들은 쿰란 주변 동굴들을 샅샅이 발굴했다. 11개의 동굴에서 약 800개에 달하는 두루마리 책의 일부 또는 작은 조각들을 찾아냈다.
또한, 사해사본들을 필사하고 기록했던 공동체(쿰란 공동체라고 부른다)의 유적도 발굴했다.
쿰란 공동체는 유대교의 한 분판였던 에세네파 사람들로서, 서기전 1세기부터 사해 근처의 광야, 쿰란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이들은 임박한 세상의 종말을 대망하며 살았던 종말론적 공동체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서기 68년,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던 로마 군대는 이 쿰란 공동체까지 완전히 파괴했다. 그들은 로마 군대가 쳐들어오자 두루마리 구약성경과 종교 문헌들을 질그릇 항아리에 넣어 근처 동굴들에 숨겨놓은 것이었다.
그러면 사해사본이 갖는 중요성은 무엇인가. 기독교를 '책의 종교'라고 부를 만큼 성경은 교회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오늘날 성경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 원본에서 필사한 사본(寫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면 구약성경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언제 때의 것일까. 사해사본이 발견되기 이전까지는 서기 10세기 때의 것이 가장 오래된 사본이었다. 그러나 사해사본의 발견으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사해사본의 연대는 서기전 1세기에서 서기 60년대 사이의 것이다. 즉,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의 것이다. 사해사본은 현존하는 구약 사본으로서는 최고(最古)의 사본이다.
따라서 구약 사본의 역사를 종전보다 약 1,000년 앞당기게 해주었다. 사해사본은 구약성서 사본연구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쿰란, 사해사본, 수케닉, 야딘은 성지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출처 : 성지순례 - 초대교회 발자취를 따라/박준서 지음/ 조선일보사/p8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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