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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 동굴을 지나 남쪽으로 자동차를 달린다. 왼편으로는 사해가 이어진다. 도로폭은 좁지만, 성지 최남단 도시 엘랏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 1번 국도다. 차창 밖으로는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메마른 대지 유대 광야가 펼쳐진다.
쿰란으로부터 50km쯤 남쪽으로 달려내려오면 유대 광야 오른 편에 우뚝 선 특이한 형태의 언덕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흡사 거대한 타원형 원통을 중간에서 잘라놓은 듯한 모양이다.
높이 450m인 이 언덕은 사람의 접근을 막으려는 듯 경사도가 거의 절벽과 같다. 그러나 정상 부분은 닦아놓은 운동장처럼 평평하다. 정상 부분의 크기는 길이가 약 600m, 폭(가운데 부분)이 약 250m. 바로 이곳이 유대 역사상 잊을 수 없는 비극의 현장 마사다이다. 마사다는 지형적으로 천연적인 요새다. 이 점을 처음 간파했던 사람은 유대의 왕이었던 헤롯(서기전 37~4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왕비도 서슴지 않고 죽였던 폭군이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항상 피해망상에 시달렸던 사람이었다. 유대인들의 반란이 두려웠고, 왕위를 노리는 찬탈자들이 염려되었다. 그는 유사시에 피신할 수 있는 요새궁전을 마련했다. 바로 마사다였다.
그는 마사다 정상 북쪽 끝 아슬아슬한 절벽부분에 계단 모양의 3층 궁전을 지었다. 절벽 위에 세운 궁전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건축기술의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헤롯은 천혜의 요새지에 궁전을 세우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정상부분을 성벽으로 둘러쌓았다. 길이가 1,300m였다. 또한 저수장과 여러 개의 곡식창고도 만들었다.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 그러나 헤롯 왕 때는 마사다가 요새 기능을 발휘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 3년 저항 끝에 '자유로운 죽음' 선택 -

헤롯이 죽은 지 약 70년 후 마사다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됐다. 서기 66년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5년 동안이나 계속된 유대인 반란은 서기 70년 8월 로마 제국의 티투스(Titus) 장군이 예루살렘을 함락, 파괴함으로써 진압되었다. 이 때 예루살렘 성전(두 번째 성전)도 불에 타 파괴되었다.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게 함락될 때 끝까지 저항하던 약 960명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마사다 요새로 이동했다. 엘리아살 벤 야일(Eleazar ben Yair)을 지도자로 하는 이들은 마사다 요새에 올라가 진을 치고, 저항을 계속했다. 로마 제국은 이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실바(Silva)장군이 이끄는 제 10군단을 마사다에 보냈다.
그러나 무적의 로마 군단도 마사다의 지형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로마 군대는 3년간 포위공격 끝에 마사다 정상 부분까지 이르는 토담 경사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서기 73년 5월, 토담 경사로를 타고 올라간 로마 군대는 마사다 성문에 불을 지르고, 성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치열한 전투와 끈질긴 저항이 계속되는 가운데 날은 저물었고, 로마 군대는 일단 퇴진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다시 마사다를 공격한 로마군은 놀랍게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다. 로마군이 성벽을 무너뜨리고 마사다 안으로 진격했을 때 그곳에는 무서운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3년간 마사다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던 유대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당시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퍼스(Josephus)의 증언이다.
'로마 군대가 마사다 성벽을 부수기 시작한 날 밤, 유대인 지도자 벤 야일은 960여 명의 동지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했다.
비굴한 항복이냐, 로마인의 칼에 의한 죽음이냐. 벤 야일은 제3의 선택을 제시했다. 자유인으로서 죽음을 택하는 것이었다.
먼저 그들은 모든 소유물을 한데 모아 불살랐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가족 중 여자와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끊게 했다.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열 사람을 뽑아 나머지 남자들을 죽이게 했다. 뽑히지 못한 남자들은 이미 죽은 부인과 아이들을 끌어안고 목을 내밀었다. 열 사람만 남게되자 그들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랐다. 마지막 사람은 다른 아홉 명을 죽인 뒤 칼에 엎드려 자결했다.'
그러면 역사가 요세퍼스는 어떻게 마사다의 최후를 알 수 있었을까. 그의 기록은 이렇게 계속된다. '로마 군대가 마사다를 함락시켰을 때, 동굴 속에 숨어있던 2명의 여자와 5명의 어린이를 발견했다.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마사다 최후의 증인들이었다.' 요세퍼스는 이들의 증언을 그의 역사책 '유대인 전쟁기'에 기록하여 남겨놓은 것이다.



- 11개 토기조각으로 남은 비극의 역사 -

1960년대 중반, 마사다에서 대규모 고고학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발굴단장은 사해사본 발견에 공헌한 야딘(Yadin)이었다. 그는 이 발굴에서 헤롯 왕의 궁전 뿐만 아니라, 비극적 최후를 마쳤던 유대인들의 유물도 많이 찾아냈다. 그들이 신던 가죽 샌들과 물건을 담았던 바구니, 그들이 사용했던 14개의 두루마리 성경책 등... 모두 소중한 고고학적 자료들이다. 야딘은 식량창고도 발굴했다. 항아리에는 곡식이 남아 있었다. 식량이 떨어져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곡식을 담았던 항아리 중에는 히브리어로 '십일조'라고 표시된 것도 있었다. 그들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십일조 바치기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고고학자 야딘은 히브리 이름이 쓰여있는 11개의 토기조각도 발견하였다. 그 중 하나에는 '벤 야일'이란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곳에서 저항하던 유대인 지도자의 이름이다. 이름이 쓰여진 11개의 토기조각들은 무엇일까? 야딘은 마사다 최후의 날 밤, 제비를 뽑을 때 사용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요세퍼스 역사기록의 정확성을 확인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오늘날 마사다는 유대인들이 힘이 약해 죽음으로 항거할 수 밖에 없었던 비극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굳은 결의를 다짐하는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군대훈련의 최종 코스는 마사다에 오르는 것이다. 마사다 정상에서 그들을 목소리를 합하여 힘차게 외친다. "마사다의 비극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Masada Never Again!)"

출처 : 성지순례 - 초대교회 발자취를 따라/박준서 지음/조선일보사/p8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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